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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뤽페리)를 읽고나서..

SudekY 2019. 7. 17. 13:32

사랑에 관하여(뤽페리)

 요즘에는 한밭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를 때마다 고민이 많이 된다. 내 개인의 철학적 생각도 어느 정도 귀결되어가고 있고(사실상 귀결 날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흥미가 가는 분야도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빌릴 당시에 나의 인생에 있어서 철학과 논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논리에 관한 책 하나와 사랑에 관한 책을 하나 빌렸다. 나는 이 책이 그저 가벼운 책인 줄 알고 빌렸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에 관한 책으로서 이제 우리는 해체주의를 벗어나 사랑이 중심이 되는 두 번째 인본주의로 향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설득하는 책이다. 나는 솔직히 이해력이 높지가 책의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에 결론 부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사랑이 우리가 이제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상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문장들이다. 책을 전부다 이해한들 무엇할까 내가 감명 깊게 남지 못했다면 기억 저 멀리 물러갈 것이다. 나에게 어떤 배울 점이 있는 문장과 글귀가 있다면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봅시다.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삶을 항상 그렇게 쉽게 풀어주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연애결혼은 실패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연애결혼이 어떤 면에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연애도 못하는 정해진 결혼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연애결혼은 인간이 인간성을 드러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동물은 연애결혼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의 목표는 변화를 읽어내는 열쇠들을 제시하고 그 변화가 개인적ㆍ집단적 삶의 주요 국면들에 불러올 여러 가지 결과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뤽 페리가 주장하는 사랑이 어떻게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 삶의 주요 국면들에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이다.

 

"그 원칙(철학적)들도 우리 마음에 와 닿고 때로는 엄청 위대해 보이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정말 '그 원칙(대로)' 살기로 결심해요. 그렇지만 그 원칙들이 오늘날의 삶과 뭔가 동떨어져 있고 완전히 과거에 처박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살짝 혼란이 왔다. 나는 스토아 철학을 중시하는데 현재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스토아 철학을 버리기보다는 현재 삶에 타협하여 맞추기로 생각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사랑 혁명이 정말 중요할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랑도 그저 사회성의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랑의 미적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매우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과거에 쓰였던 것과는 다른 지침이 필요할 뿐이죠.

1. 첫째,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항상 점점 더욱더 인간적인 것, 인간성을 담은 것으로 나아갑니다

2. 둘째, 구원의 교의들이 점점 더 '효과적인'것이 되어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3. 셋째, 죽음과의 관계가 변합니다."

세 번째 죽음과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에 동감한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당대 철학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첫째와 둘째는 점점 논리가 필요한 것(?)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과거에 거하는 사상가들은 아무리 진정성과 재능을 갖추었어도 비관주의를 앞세우는 장사 밑천 관리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과거의 사상에 대한 한계성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과거의 사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면에서 인정한다.

 

"사실 사랑에서 '이상'의 정의는 늘 '그 이상에 도달해야 한다'라는 생각과 다소간 충돌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연애 이야기에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늘 끝이 있지요. 그렇지만 연애가 끝이 난다고 해서 꼭 그 연애가 실패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 연애가 놀라운 사랑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랑에 충실할 수도 있어요. 물론 이상에 비추어보면 실패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상을 이미 끝난 사랑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한 지렛대처럼 사용해봤자 꼼짝도 안 할 겁니다. 그런 통찰력은 쉽게 생기지 않아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음반 같다고 할까요."

어쩌면 이상과 현실은 전혀 만날 수 없는 인연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상을 펼치지 못했다고 하여서 그러한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비관적이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이상에 닿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상을 향해 실천할 뿐이다. 그것이 인간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동물과 다르게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목적이 생기고 목표가 생긴다. 나는 신기하게 딱 이 페이지를 읽을 시점에 연애에 실패를 맛보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실패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상에서는 (영원히 이상과 닿을 수 없다.) 가깝다고 할 수 없었지만 나도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이 지금 내가 말하는 부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철학척 얘기인 것 같지만 나는 여하튼 이러한 점을 느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이러한 것을 느낀다.

 

"따라서 연애결혼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유럽의 산물, 산업혁명으로 가능해진 산물입니다."

비교적 역사가 길지 않다는 것에 놀라웠다. 너무 매체에서 과거에서도 연애를 당연하듯 끌어와서 그런 것일까 생각이 든다.

 

"연애감정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연애감정에 근거한 결혼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다름없죠. 정념은 원래 연약하고 변하기 쉬워요."

정념(念 :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은 말 그대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연속성을 가지며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연애라는 감정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이 스토커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은 변한다.

 

"가령 상대가 미모나 명석한 두뇌를 잃는다면 사랑도 잃게 되나요? 물론 지성, 미모, 매력을 사랑할 수도 있어요. 그런 장점들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유지해주기도 하죠. 하지만 진짜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사랑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그런 이상에 도달한 적이 없다.

 

"목숨을 걸 수도 있는 가치들이란 곧 우리 삶에, 혹은 우리 삶 속에(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의미를 주는 가치들이지요."

나도 목숨을 거는 사랑을 가지고 싶지는 않지만 신념을 가지고 싶다. 목숨을 걸 만큼의 신념이 잘못되었다면 문제겠지만 올바른 신념이라면 내 삶에서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목숨을 걸만큼은 아니다. 목숨을 걸만큼이라면 내가 목숨을 걸만큼의 상황이어야 가능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사랑 혁명이 절대정신의 생에서 정치, 교육, 예술이라는 세 영역에 불러온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아주 결정적으로 보일뿐 아니라 개인적 삶의 차원을 벗어나죠"

사랑이 세 영역에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대해 주장한다. 나도 정말로 사람들이 사랑을 기준으로 바뀔 수 있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은 옳다.

 

"급진적인 '교육' 개혁 운동의 기원도 다르지 않죠. 아이의 '타자성' , 아이의 환원 불가능한 특이성을 보려는 시도가 교육을 포기하는 결과, 말 그대로 아이를 방임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어요. 타자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수용하자는 의도가 그런 결과까지도 낳았던 겁니다."

개혁이라고 하면 전부다 싹 다 바꾸려 하고 아니라고 하면 전부다 고수하려고 하고 뭐하나 한 번에 바뀌는 것 때문에 방임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는 이런 면을 보면서 특정 사상이 긍정적으로 보여도 결국에는 이러한 결과를 낳는 것을 보고 정말 사상이라는 것이 함부로 취급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옛날의 교육체제가 요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잘 맞는 것 같으면 왜 사라졌겠어요. 학교가 변했다면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정말 요즘에는 복고를 추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데 그것은 추억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정말 사라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면 없어지지 않았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과거의 이상한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한 경향을 추구하지 말자.

 

"박애를 건강보험이나 복지국가의 혜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대감, 불의의 사고로 우리 삶이 크게 흔들리거나 파괴되었을 때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유대감으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박애도 민주주의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박애의 뜻은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박애가 민주주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한다면 민주주의는 사라질 수 있을 정도로 이상적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것이 이상적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념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일반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상정하는 것처럼 합리적 존재들이라면 언제나 타협을 볼 것입니다. 그런 점만 봐도 이익이 아니라 정념이 세상을 이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는 정념에 이끌리는 것이 너무도 많다. 가장 가까운 마케팅부터 시작해서 뉴스를 보면은 우리 주변에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데도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이에 관해서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과 근거보다는 정념과 감정에 이끌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무의식은 감정과 정념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들이 감당하고 책임지지 못한 양육을 자꾸 학교에 떠넘기려 하지요.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가정에서 양육을 잘 받게 하여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육과 관련된 일을 교사에게서 털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합니다. ~~~ 대부분의 경우, 현대 가족 내에서 부모들은 아이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경배하고(adorer) 있어요."

이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맘충'이 등장한다. 양육을 학교에 떠넘기려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그저 사랑의 존재로만 비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들이나 딸이 하고 싶은 것은 다하게 하고 나머지는 전부 학교에 맡긴다. 

요새 인성이 얼마나 중요하게 대두 대는지를 보면 우리의 교육환경이 너무 양육을 학교에 전부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밥상머리 교육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양육을 직접 해야 된다. 

 

"매일 저녁 삼십 분, 아니 십오 분이라도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그리스 신화를 들려주고, 그다음에는 위대한 문학작품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아이에게 황홀한 즐거움은 제공하는 동시에 아이가 작품들과 개인적인 유대를 맺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적 지표들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는 놀라운 '이행 대상'이자 놀라운 생각, 가치, 감정을 나누는 토론의 주제죠. 요컨대 사랑을 존재케 하고 특화하고 다양화하는 멋진 방법,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을 '도식화하는(schematiser)' 방법이 되겠습니다."

사랑을 한다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서로의 진실된 철학과 생각을 말해주며 아이와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꼭 책이 아니어도 된다. 아이를 아이로 취급하지 말고 그저 하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소통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는 보물이 아니다. 아이를 보물 취급하지 말자.

 

"우리에겐 사랑이 '활용'되고, 개별화되고 구체화되기 위해서 매개, 이행 대상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 '네가 우리의 사랑이야' 소리만 하면서, 뺨에 뽀뽀만 해대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내가 사랑을 할 때 이 점에서 의문을 품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사랑은 이것을 실체화하기 위한 이행대상이 필요하다. 정말 뽀뽀랑 섹스만 한다고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 같은 기억과 경험은 좋은 매개 대상이다.

 

"의욕이나 흥미가 학습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학습이 먼저 이루어짐으로써 흥미가 생기죠. 자기가 웬만큼 해보지 않고서는 정말로 흥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수프의 덩어리 진 부분, 교육의 골치 아픈 부분, 모든 고문도구(tripalium)를 제거하고 싶었던 거죠 결국 우리는 이쪽도 잃고 저쪽도 잃었습니다. 사랑이 승리하지도 못했고 법의 권위와 지식이라는 중대한 두 차원도 상당 부분 무너져 내렸죠."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전부를 잃었다는 것은 정말 정답이다. 자기는 그저 아이에게 착한 엄마나 아빠로 남고 싶은 것이다. 아이를 위한다지만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부분이 정말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잘못 생각되고 있다. 아니 이건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로 방어막을 써서 다른 개념을 싹 다 무시해버리는 처사인 것 같다.

 

"인간은 이제 이상화되지 않고, 합리적 존재나 명징(깨끗하고 맑다)한 의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진정한 비참과 위대함을 다 알고 있는 인간, 특정 시대와 결부된 온갖 다채로운 경험들을 간직한 인간이 드러나죠."

나도 이와 같이 생각한다. 수많은 심리학과 과학, 철학책을 읽으면서 내가 깨달은 바는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 실수도 엉청많이하며 게다가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근거이다. 우리는 시대의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도,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겪게 될 경험 앞에서도 아직도 세상에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는 한, 현실태로든 가능태로든 사랑이 이 삶에 존속하는 한, 삶은 여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기에 사랑이 뭐가 필요하느냐는 말은 죽음이 있는데 왜 사냐는 말과 똑같은 질문이다. 나는 물론 그리스도교가 아닌 불교 쪽에 가까운 무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사랑이 정말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극한의 가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제는 칸트의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가 아니라 '네가 내리는(공적) 결정이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게끔 행동하라'입니다. 나는 이 원칙이 보기 드물게 훌륭한 지표, 정치에 있어서는 최고의 나침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어떻게 지금 사회적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현실적이지 않는 생각이다. 

 

"사랑이 율법의 메시지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되레 초월적인 정언명령을 가하지 않고도 그 메시지를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더불어 분열과 불화의 종교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사랑이 추구된다면 우리는 종교를 뛰어넘는다는 확신은 든다.

 

 

 

 이 책의 저자는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어쩔 수 없지 가림막을 하고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무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랑 혁명으로서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근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전부 사람들이 전부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밝아질 것이고 문제가 하나 없이 살 것이라고 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나는 솔직히 이 책을 기대하면서 봤다. 왜냐하면 나도 사랑이 최고의 가치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흔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확신이 아직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확신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너무 비 현실적인 것 같았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든다. 

 

 근거를 대고 왜 이렇게 해야 되냐고 하냐는 말은 솔직히 하기 쉽다. 하지만 그 반대의 이야기는 더욱더 힘들다. 

이러한 반대의 이야기를 전부 설명하면서 나아갔다면 책이 더 두꺼워질지 언정 나는 더 납득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한 나의 기준이 바뀌었다. 사랑은 감정뿐 아니라 이성까지 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가 시작인지는 모르겠다. 사랑을 추구하게끔 해야지 이상적인 사회가 되는 것인지 이상적인 사회가 되어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인지...

이에 대한 대답을 추후에 읽는 어떤 책(이 될지는 모르지만)이 대답해주기를 바란다.

 

 그래도 나름 철학적 역사를 생각하고 사 유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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