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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를 읽고나서..

SudekY 2019. 7. 30. 15:36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최근 죽음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최근 읽게 되고 있는 철학책에서의 철학들이 죽음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등 철학적 질문들은 전부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사람이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항시 죽음을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한밭도서관에서 죽음에 관한 책 두 권을 빌렸고 이 책은 그중 첫 번째로 읽은 책이다.

 

 제목부터가 상당히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이 읽어야 될 것 같은 책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설령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죽음이 멀리 있다고 하여 죽음이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아직 누군가는 당장 죽음이 멀리 느껴질 수 있지만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죽음이 가까이 와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은 상당한 도움이 된다. 물론 타인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나는 솔직히 이 책을 읽고 충격에 빠진 것이 솔직히 지금까지 어떻게 죽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할 생각들을 미리 해볼 수 있게 어쩌면 당장 내일에라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준다.

 

 다음은 책의 목차이다.

 

1. 독립적인 삶 -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2. 무너짐 -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3. 의존 -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린다.

4. 도움 -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5. 더 나은 삶 -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6. 내려놓기 -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

7. 어려운 대화 -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나의 죽음에 관하여서는 어떻게 죽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절대로 실전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주관성이 매우 강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죽는 순간까지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준다. 

책에 나오는 죽어가는 노인들이나 병 걸린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죽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알려주며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다음은 감명 깊게 남은 문장이다.

 

"우리 전 세대까지는 자연이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상하고 받아들였다. 의사들은 패배의 징후를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려 했고, 그것을 부정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덜 오만하게 굴었다."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선조들은 죽을 때 의학기술이 없어서 그런지 신앙이나 신념이 강해서 그런지 지금보다는 죽음을 더 잘 마주했고 담담히 받아들인 것 같다. 실제 통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은 누구보다 의학의 힘이 커고 의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들은 확실히 죽음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사람이 변한다고 믿지 않는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철학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딱 두 가지 경우에서는 사람이 바뀐다고 믿는다. 죽음을 마주하거나 죽을 각오를 할 때는 바뀐다. 누군가 큰돈을 벌었는데 병에 걸려 아픈 뒤로 돈의 덧없음을 깨닫고 큰 기부를 한다거나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죽음이 앞에 있을 때는 글쓴이 말대로 우리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부정하며 돈과 같이 영원할 것처럼 산다.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나이 들고 병들어가는 과정에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건 '삶에는 끌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며..."

나도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죽음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이 무한한 존재임을 믿는 것이고 자신이 무한하다는 존재라는 것은 자신 앞에 진짜 유한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가령 사랑이나 가정, 용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삶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이제 소중한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령으로 죽는 것은 드물고, 특이하고, 놀라운 현상이며 다른 형태의 죽음보다 훨씬 부자연스럽다. 그것은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이다

그러니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균수명 80세가 넘는지 금,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훨씬 넘어 살고 있는 특이한 생명체인 셈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노화라는 현상은 결국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보다 부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노령으로 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몸의 모든 기관들이 동시에 생명력을 다하며 어느 순간 딱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사실 이러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병 안 걸리고 늙어서 죽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상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죽음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죽을 것이다. 물론 원인은 노령이 될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서 편안히 죽는 모습은 없는 것이다.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죽음은 왜 두려울까? 그것은 상실이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상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과정 또한 왜 두려운가? 똑같다. 그것은 상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상실할까. 그것은 생활방식이 제일 큰 것 같다. 내가 어제 좋아하는 배드민턴을 쳤는데 내일 내가 노령으로 죽는다고 했을 때 배드민턴을 오늘도 칠 수 있다면 죽음이 덜 두렵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죽어가는 과정에서는 삶의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내일 죽는다 해도 참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고, 원하는 것도 다 누려 봤으니까"

"해리 트루먼은 자기 집에 끝까지 남아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린 시대에 큰 의미를 남긴 것이다."

해리 트루먼은 용암이 쏟아지는데도 집을 벗어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다. 해리 트루먼은 집을 떠나는 순간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그것은 곧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죽음의 각오를 할 수 있는 그의 신념은 굉장히 존경스럽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1961년에 출간한 「정신병원」이라는 책에서 감옥과 요양원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그는 군대 훈련소, 고아원, 정신병원과 함께 감옥과 요양원이 사회 전반과 대체로 단절된 '전체적 기관'의 전형이라고 규정했다."

군대 훈련소나 고아원보다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이 더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관련되서는 정신병원과 요양원이 더 가까워 보인다. 그중에서도 요양원이 가장 가까워 보인다. 요양원을 나오는 것은 대부분 죽을 때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 같았다."

내가 몸이 쇠약해져서 어떠한 것을 할 때 행복할까 생각해보면 그저 암울한 것은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늙고 쇠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됐을 때에도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위에 생각에 대한 답이다. 무엇이 더 가치가 있을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 만약에 그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허약하다면 어찌해야 하지?...

 

"삶을 추동하는 주요 동기는 꾸준하고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엄청난 변화를 거친다."

삶을 추동하는 동기는 계속해서 변하기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내가 할 행위에 의미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생명의 덧없음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 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꼭 나이가 먹어서 죽음을 앞두어야만 삶의 목표와 동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관점을 바꾼다면 변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어떠할까 '생명의 덧없음의 덧없음'이라는 관점 말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 '스스로는 자율권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길 바라는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점이 노쇠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크고 역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바라는 일들 중에는 정작 자신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들이 많다는 거죠. 자아감을 침해하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제대로 죽을 수 없는 이 가 많다. 자신이 더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죽는 이를 자기 앞에 두고 묶는 행위는 죽는 이를 더욱더 고통받게 하는 것이다. 글쓴이도 이점에서 죽는 이 가 자아감을 침해당한다고 말한다.

 

"나는 거절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그 점 때문에 좋은 세일즈맨이 됐던 것 같아요"

이건 그냥 이러한 관점이 좋은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아 적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망률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 싶다. 내가 몸이 아파도, 죽을듯한 고통이 있어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굉장히 인간답고 인간적인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러한 용기가 있고 싶다. 이러한 용기가 있기 위해서는 죽음을 잊지 말고 삶의 의미를 죽음으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계획은 거꾸로...

 

"그 대의는 큰 것(가족, 국가, 원칙) 일 수도, 작은 것(건축계획, 애완동물) 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점이다."

내가 삶의 마지막에 다가왔을 때는 큰 대의를 목표로 할 수는 없지만 작은 대의 또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먹으면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해지는 면이 있다. 그렇기에 그 점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대의를 찾는 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경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글쓴이도 그렇지만 죽음은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은 죽음이 더 큰 무언가를 위한 무언가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좋은 교훈을 주기도 하고 죽음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알려주기도 하며 죽음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옆에 아내와 자식이나 친구가 더욱더 소중하다고 말해주거나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정말 감성적이라고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이성적으로만 목표를 세우기에는 인간의 뇌는 강하지 않다. 3

 

"삶이 기울어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버렸다."

요즘 의료가 그런 것 같다. 마지막까지 의료행위에 목숨 거는 사람이 많은 것 같고 모든 권한을 다 위임해주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양이 삶의 가치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안전이라는 게 공허한 데다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목표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자율성도 마찬가지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의 양이 적을 수 있기에 나는 그들보다는 내가 삶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인지 알고 있기에 예전에 그런 생각을 고쳤다. 

 

"오늘날 비참한 질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 됐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올 때까지 오랜 의학적 투쟁을 벌인 끝에 죽음을 맞는다."

계속해서 듣는 말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죽음을 굉장히 안타깝게 여긴다. 거의 의미 없는 의학적 투쟁에 남은 인생을 허비하며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잃고 죽음을 가지게 된다.

 

" '죽게 될까요?' 자매들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죽는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웠다. 지난 몇십 년 사이, 의학은 죽음에 관해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경험과 전통, 표현들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들어버렸고, 인류에게 새로운

문제를 안겨주었다. 바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과연 정말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이글의 핵심이다.

 

"우리는 과도하게 낙관적인 것보다 과도하게 비관적인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걱정된다. 그리고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엄청나게 불편하고 곤란하게 여긴다. 의사들은 새라 모노폴리와 같은 환자를 대할 때 진실에 직면하는 일은 뒤로 미룬다."

왜 우리는 어쩌다가 죽음에 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을까?

시대에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는 면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는 죽음에 관한 얘기를 정말 필요한 이에게 해줄 수 없고 그 사람이 그 얘기를 할 수 없어 여생을 고통으로 보낸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피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선택할 수 없듯이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 죽음을 외면한 이에게 좋은 삶은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죽음을 말하지 않는 의사는 좋은 의료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학적인 의사결정은 크게 실패를 했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하느라 환자들에게 오히려 해를 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    더 오래 살려는 노력을 멈춰야만 더 오래 산다는..."

미래에는 의학적인 결정으로 영생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미래이고 지금의 의학적인 의사결정은 실패했다는 말에 동의한다. 지금 의학적인 의사결정으로 여생을 편하게 보내고 죽는 경우가 몇몇 경우나 될까?

 

"아버지는 평생 지켜 왔지만 이제는 자기에게서 멀어져 가는 정체성에 매달리는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그어 둔 삶의 한계선을 다른 자리로 옮겼다. 바로 이것이 자율성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다. 삶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제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간다는 건 그 상황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제어할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죽음에 앞서서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될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곧 할 것이다. 물론 그때 가서도 바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로 지속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상황을 제어할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정말 중요한 자세인 것 같다. 인간이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러한 과정이고 죽음을 앞에 둔 삶에서의 인간다운 자세란 이런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도 꼭 저러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고 삶을 유지할 것이다. 

 

"삶의 이유는 단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거나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됐을 때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인간은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한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이 말이 굉장히 다시금 와 닿는다. 의미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글쓴이는 좋은 죽음은 없고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고 한다. 그저 죽음 앞에서의 좋은 삶만 있을 뿐이고 그러한 좋은 삶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자율성을 느끼는 삶이라고 말한다. 나도 이러한 삶이 아직도 어떠한 삶인지 그저 글로만 읽어서 모른다. 하지만 대충은 알 것 같다. 희미하게나마 내가 내 인생의 마지막에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후기를 쓰자면 정말로 기억에 남는 책이다. 지금까지 죽음에 관하여는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정작 죽을 때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이 먹으면 하겠지라고 넘겼는데 그러한 부분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죽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말을 한다. 나는 죽을 때 어떠한 정체성을 가질 것이며 어떠한 생각을 할까? 또한 어떠한 병에 걸려서 어떠한 자율성을 잃고 또 어떠한 자율성을 얻을까? 아마 정답은 없을 것이다.

 

 삶은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 또한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죽음에 관해서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을 가까이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죽음에 앞서서 내가 어떻게 의료행위를 받아야 하는지부터 그전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의 정답을 모두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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