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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구인회)를 읽고나서..

SudekY 2019. 8. 7. 19:18

죽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구인회)

 이 책을 빌린 것은 죽음에 관한 궁금증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새 철학에 빠졌다고는 못하지만 철학이라는 게 은근한 매력이 있었고 죽음에 대한 것 또한 어떻게 해석할까 궁금해서 빌렸다. 

 

 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도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과 쪽에서의 어려운 책 하나를 꼽자면 '과학혁명의 구조'가 제일 힘들었는데 이 책은 인문 쪽에서 제일로 어렵게 읽은 책이다. 책을 핀 순간 초반에는 잘 읽히는 듯싶었으나 슬슬 철학의 역사가 나오고 철학자들이 한 말들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니 엄청나게 어려웠다. 무려 1시간에 15페이지 정도밖에 못 읽는 엄청난 공부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계속 읽었다. 책을 피고 30페이지 이상 읽었으면 끝까지 봐야 된다. 남자가 책을 폈으면 끝장을 봐야 되지 않겠나?

 

 책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다른 영어로 된 철학책(?), 회고록(?) 이런 것들을 인용하여 쓸 때 번역을 깔끔하게 하지 못하게 한 것도 있고 내가 인문학 출신이 아니다 보니 생소한 단어도 많았고 철학용어 또한 굉장히 생소한 것들이 많았던 부분이 있어서 훨씬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단어를 모르면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을 하고 철학적 용어를 파악하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커서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그리고 찾아보니 아예 철학적 용어라는 게 대부분 한 철학자가 주장하는 그런 개념가 함께 탄생한 것들이 많아서 나 같은 철학 문맹자는 더욱더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도 작용한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나 같은 초보자들에게는 친절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들게 읽으니 보람이 느껴졌고 원래 철학이 쉽겠나 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었던 것 같다. 작가님도 힘들었을 거다...

 

 다음은 감명 깊은 문장들과 나의 생각들이다.

 

"미래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확실성에 의해 한정된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항시 자신의 시간성에 대해 앎의 의미한다. 이것은 곧 죽음에 대한 앎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앎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극복하려는 시도든, 강박관념이든, 죽음의 절 방성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해화하기 위한 노력이든 죽음의 문제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현존한다. 인간 존재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지평에 던져 살게 된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물음이 된다. 죽음은 죽음 안에 갇혀있는 이 삶에게 묻는다. 그러므로 죽음 자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들을 다를 수 없다."

죽음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면 죽음을 안다고 해서 죽음이 문제를 해결해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죽음을 아는 것과 죽음이 두려운 것은 다른 것 같다. 죽음을 알고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이 두려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죽음 자체에 결정적인 의미라는 것은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무도 자기 자신의 죽음이나 죽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무의식 중에 우리는 모두 자신의 불멸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죽음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요즘 세상에서 죽음은 금기시되어있다. 그러하여 다들 자기가 평생 살듯한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부정한다.

 

"플리니우스는 신화적 죽음의 사색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신들조차 죽을 운명의 것을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 것과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도시

고대 신화는 인간을 죽어야 할 존재이며 그 사멸 성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멋있어서 적어봤다. 신들조차 인간의 죽음을 돌이킬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은 신조차도 극복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 죽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생성은 단지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 결국 모든 변화는 하나의 환상이며, 죽음도 역시 모든 것 중에 가장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의 사상이 이러하지 않은가. 실체가 없고 모든 것은 허상이며 죽음 또한 삶이 있어 생기는 허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자세가 죽음을 극복 가능한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불교를 존경하면서도 이런 것에 대해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불교에 깊이 심취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도시의 성벽이 적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 같은 그러한 보호는 죽음 앞에서는 결코 소용없다. 그것은 죽음이 우리가 방어할 수 없는 적이며 따라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표현이 멋있는 것 같다. 죽음에서 도망간다 한들 회피한다 한들 어차피 그런 보호막이 무엇이든 종말은 온다. 죽음은 절대 피할 수 없다. 

 

"정신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잘못된 것이다 말하고 그것과 끝내고 어떤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저러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그 곁에 머무름으로써 가능하다."

정신이 힘을 발휘할 때는 죽음을 외면하고 부정할 때가 아니라 직시할 때 발휘하는 것이다. 힘든 것을 극복하는 사람은 힘든 것을 직시했었기에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인생이 힘들 때 도망가는 사람은 맞서 싸운 이 보다 정신의 힘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처럼 죽음 또한 회피하는 사람보다 직시하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볼순 없지만 약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훗날 헤겔은 「미학 강의록」에 사랑의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는 것, 다른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잊는 것, 그러나 이러한 소멸과 잊음 가운데 비로소 자신을 가지고 소유하는 것에 있다"

고 썼다."

여담이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이러한 표현을 볼 때면 사랑을 희생과 잘 구별 못하겠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자신으로 가서 자신을 소유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그녀가 되어 그녀 안에서 나를 발견한다? 아직.. 잘 모르겠다.. 너무 고차원적인 사랑이 아닐까 싶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인간을 욕망과 충동 사이의 출구 없는 갈등에 고정시킨다. 의지에서 발생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받는다. 그러나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 새로운 욕망을 추구하지 않으면 공허와 권태에 빠진다. 행복과 안녕은 다만 욕망, 충족 그리고 새로운 욕망의 빠른 연속 가운데 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지속적인 충족은 불가능하며 모든 행복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다. 모든 욕망은 단지 순간 적적으로 충족될 뿐이며, 그 기반이 결핍에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존재를 견디는가? 쇼펜하우어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개인은 의지의 객관화이다."

나도 그렇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의지를 뇌 속의 도파민과 동기로 비교하자면 비슷한 것 같다. 욕망을 꿈꾸고 실현되면 잠깐 행복하고 다시 더 큰 욕망을 찾는다. 내가 인생을 살다가 이런 부분에서 현자 타임이 와서 책을 통해 해결책을 찾고 싶어 책을 읽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이러한 욕망의 굴레에서 결론적으로 나는 어디로 가고 그 끝에 죽음이 있는데 그리고 죽음은 이 욕망 앞에서 모든 것을 허무하게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왜냐하면 죽음 후에 존재하지 않음은 출생 전에 존재하지 않음과 다르지 않으며, 더 한탄스러워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논박할 수 없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출생 전을 생각해보면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출생 전에는 그저 무였다.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이 어느 정도의 위안은 주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무화되어 죽어가는 존재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그 존재의 유한성을 피할 길이 없다. 눈이 다른 모든 것을 보면서도 그 자체는 볼 수 없듯이, 자아는 의식에서 어두운 점이다.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우리의 본질 자체는 우리에게 수수께끼일 뿐이다."

표현이 좋다. 자아를 눈에 비유한 것은 정말 멋진 것 같다. 

눈이 자체를 못 보니 자아가 자아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기에 우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남이 나를 봐준다면 본질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눈이 자신은 못 보지만 다른 사람 눈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눈 안에서 눈빛을 읽고 그 눈빛을 읽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니 다른 사람 눈을 통해 나를 본 것이 아닐까? 아마 내가 위에서 쓴 사랑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삶을 두려워한다. 삶에 대한 두려움, 궁핍과 권태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부질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저 웃고 욕망에 따르며 슬픈 것을 싫고 좋은 것만 찾는 것...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사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이 뭔가 허전함을 느끼지 않는지 궁금하다. 나를 보자면 나는 허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묻는 것은 삶의 의미를 묻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 죽음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는 존재로서 삶을 더욱 진실하게 대하게 되고 자기 삶의 의미도 더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각자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 죽음은 우리 삶의 종착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삶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를 묻는 것은 곧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며, 죽음을 바라보는 의식은 삶을 바라보는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나도 이렇게 생각하여서 죽음에 대하여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계속 찾다 보면 결국 죽음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거꾸로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그것이 정답이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다.

 

"종교 안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불멸성을 지향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고 종으로서의 인류가 가지는 가능성에서 자신만 부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통찰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종교에서 불명 성을 지향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다. 불명 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뭔가 사랑이랑은 먼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멸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면서도 꺼림칙하게 느끼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포이어바흐에 의해 죽음은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취소할 수 없는 자연적 사건이자 사실로써 정의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인류의 역사에서 진보의 조건이 된다. 인류 발전의 저급한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 사라지는 경우에만 인류는 이른바 더욱더 높은 삶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다."

나의 죽음은 인류의 역사에서 진보의 조건이 된다. 이러한 생각이 개인의 죽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더욱더 높은 차원을 향해야 한다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게 쉽지는 않지 않나

 

"신은 단지 죽는 것이 아니라 살해되어야 한다. ~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인간의 역사는 가장 높은 역사다."

니체가 말했다고 하는데 정말 아주 강력한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믿음의 문제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서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으나,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또한 죽음은 자연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을 특별히 나의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막상 죽음을 앞에 두면 달라진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데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계속 말하지만 이러한 결론이 난 것은 인생에서 확실한 것이 죽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니체는 이성적 죽음을 합리적이고 도덕적 정당화가 가능한 안락사의 조건으로 보며, 이것은 자의적 안락사의 한 경우다. 또한 대리인에게 생명을 끊어주도록 요청하는 것 역시 인간의 원리에 속한다고 보았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흐릿한 인간을 파악하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은 불안에 빠지면 그 근원적 이유로 보이는 것에 달려간다."

내가 죽음에 대해 공부한 이유가 불안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이 덧없는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죽음을 앞에 두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지 싶지만 그래도 의미를 찾고 만드는 유일한 것이 인간이다.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해온 것들이 모두 무가치해지고 그런 하찮은 것들에 집착해온 삶 전체가 무의미하고 공허해진다. 이러한 무상함을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분을 불안이라고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 이는 이러한 무상함에 직면할 것이다.

무상 함하니까 떠오르는 것이 강신주가 유튜브에 '마이크임팩트'에서 한 강연이 생각난다.

강신주는 이 죽음의 무상함을 피하지 말고 힐끗 보지 말고 정면으로 바라보라고 얘기한다. 정말 감명 깊은 강연이었는데 어쩌면 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친근하게 만들어준 강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죽음에 임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홀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며 홀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 각자가 홀로 부름 받는, 그리하여 결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의 절대 고속에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나 무의미에 대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마지막 태도를 취해야 한다."

도대체 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까?...

내가 만약 어떤 절대자로부터 내일 필연 히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인간의 격을 확보하는 것이며 가장 좋은 죽음(은 없지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파스칼은 "인간은 죽음, 비참, 무지를 극복할 수 없었으므로 행복해지기 위해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을 치유하지 못한 채 단지 잠시 동안 그것을 감추고 진정한 치유에 대한 의지를 방해해버리는 하나의 비참한 위로일 뿐이다."

요새 너무 행복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중독된 것 같다. 그래서 죽음을 더 피하는 것 같다. 행복의 반대쪽 극한으로 가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음을 피하고서 행복을 논할 수는 없다. 죽음을 부정하면서 행복을 논하는 사람은 평생 마약으로 쾌락을 즐기는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이제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인의 현명함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었다."

나도 이렇게 생각한다. 유튜브에 명상하는 영상들이 많은데 나는 그곳에서 죽음에 관한 명상을 본 적이 없다. 전부 내일과 미래에 대한 얘기뿐이다. 죽음은 생각 많고 고상한 사람들에게서도 멀어져 버린 것이 아닐까?

 

"마르셀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현존한다. 실제로 죽은 자 들은 "우리에게 살아남아 있으며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비춰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가장 나은 자세라고 생각한 문장이다. 죽은 자 들이 우리에게 현존한다. 나는 그러한 현존을 나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 이야기가 내가 된다면 그 이야기는 내가 죽어서도 나로서 세상 사람들에게서 얘기될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 나는 존재하니 어떻게 내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왜 사람들이 역사에 길이 남으려는지 이해가 되었다. 물론 세속적인 부분이 크겠지만 그런 엄청난 것이 아니어도 나는 작은 부분에서든 누군가에게 영향을 계속 미칠 수 있다면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기록이나 생각은 후세에 전달되며 그런 생각 또한 내가 되며 나는 존재한다. 사실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100년을 넘어 100억 년을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계속 존재한다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불확실한 삶과 죽음의 위협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불안이나 슬픔은 시간적 사건에 매달림에서 오는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하고 불안한 것이다. 죽음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고 죽음에 매몰되면 안 되다는 말 같다.

 

"죽음을 앞 둔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화해, 가족과 사회와의 화해다. 증오나 죄의식의 고리도 풀어 마무리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나이가 들어 죽음을 준비하는 순간이다."

열심히 막장으로 살다가 죽을 날이 다가오면 갑자기 세상과 화해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죽음은 항시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물음은 결국 죽음을 비존재로 규정하는 삶 자체를 묻는 것이다."

죽음을 비존재로 규정하기에 죽음에 대한 물음은 답이 없다.

 

 

 

 책의 결말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난다.

 

"우리는 죽음 후의 일을 확인할 수 없으니, 현재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수많은 철학자가 죽음의 문제와 씨름해왔지만 철학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정복하지 못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은 결국 생명의 길을 찾는 데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말이 날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철학자들이 어떠한 결론이 나서 정확한 죽음 공식을 알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엄청나게 생각 많은 철학자들 또한 죽음에 대해서 상당한 생각을 했으며 나는 그러한 관점을 다 바라본 것이다.

결국에는 어떠한 관점도 결론으로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슬프지만 알고 있었다. 삶이나 죽음이나 전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해법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는 생명의 길을 찾으라고 하는데 생명의 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무슨 말인진 알겠으나 조금만 더 설명해주지 아쉽다. 

 

 이 책은 나에게 죽음에 대하여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려준 책인 것과 동시에 엄청난 어려움과 도전을 맛보게 해 준 책이다.

누군가에게 감히 추천 못할 주제와 난이도 때문에 함부로 펼쳐볼 책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큰 교훈을 준책 같다.

특히 무엇보다 철학자들 또한 죽음 앞에서 쩔쩔매었다는 것만 알아도 죽음이 답이 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을 알 것 같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제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어떻게 삶을 살을 것인가?

이제 나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해석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니까 이런 죽음과 삶에 나의 의미를 부여할 차례이다.

한 번에 말고 조금조금씩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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