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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격(페터 비에리)를 읽고나서..

SudekY 2019. 8. 26. 22:25

삶의 격(페터 비에리)

 책의 제목이 어렵다.

''이란 무엇일까? 사전은 '격'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

 

 우리는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지만 설명하라고 하면 하기 힘든 말이나 단어들이 있다.

''이라는 단어도 이러한 것에 속하는 것 같다. 나도 이 단어가 어떤 느낌이고 어떨 때 사용하는지 알고는 있지만 왜 그 상황에서 쓰는 것이고 왜 그 느낌 인가하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나도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적'이라는 것은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이나 맥락에서의 느낌 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것 또한 말로 하기 힘들다.

이러한 단어는 ''뿐만이 아니다. 무엇인지 알지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 중에는 많다.  

예를 들면 '사랑'또한 그렇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만 설명하라고 하면 설명하기 힘들다. 다만 비유적으로 표현될 뿐이다.

 

 

추상화

 뇌가 어떠한 개념을 저장할 때에는 상화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추상화는 개념의 특징만을 뽑아서 오직 그 특징만 남기는 것이다.(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다.)

사랑에서의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

'헌신' '섹스' '키스' '교류' '의미 없는 것이라도 같이 하는 것' '동행' 등...

이러한 특징들이 모여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형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이렇게 뇌에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림' '예의' '분수' 등의 특징들이 추상화의 재료가 되어 '격'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을 정말 '안다'라고 할 수 있을까?

철학에서는 이러한 개념 하나하나를 파헤친다. 결국에는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정합성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당 단어의 근처에서 개념을 맴돌며 원을 조금씩 좁혀나간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하게 하나의 개념을 딱 정의한 것은 아니다.

다음 사진과 같이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완벽하게 하나의 개념을 딱 정의한 것은 아니다.

개념에 다가가기

 

 

 이 책은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 또한 위에 말한 방식처럼 '존엄성'에 대하여 다가간다. 

그래서 완벽하게 정의할 순 없다. 그렇지만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소망을 한다.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은 없었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아.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말로 정리해주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사고의 주변에 머무를 뿐 명확하고 뚜렷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도 실제로는 아주 많다는 것을 저자가 숨기지 않았다는 점도 좋다"

그리고 뒤이어 이렇게만 말한다면 자신의 책이 목표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책의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에서 책의 저자 '페터 비에리'의 말의 인용이 나온다. 

"처음에는 탁자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철학과 학생의 공부 책상이었죠. 거기에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막스 프리쉬가 있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두 탁자의 위치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사고를 조망하는 것과 그것을 설명으로 풀어놓아 구체화시키는 것, 이 두 지를 단단히 연결시키고 한 가지가 나머지 한 가지를 통해 계속 발전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펼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글쓴이의 말처럼 이러한 과정을 이 책에서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존엄성'이라는 단어는 "역사 속에서의 누군가의 죽음이 정당한가" 또는 요새는 '존엄사'와 관련되어서 들어본 적이 많다.

'정의'와 관련된 책에서도 '존엄성'이라는 단어도 많이 나왔다.

나는 '존엄성'이 무엇인지 잡으려고 하면 무엇인지 모르는 것처럼 위와 같은 '사랑'과 '격'과 같다고 생각한다. 근데 '사랑'과 '격'에 비해서 더욱더 무겁고 고결해 보인다.

그래서 더욱더 안 쓰는 단어이며 그래서 경험이 더 적고 오히려 '사랑'이라는 단어가 더 쉬워 보인다.

대충 이러이러하다 라고 표현한다면 "타인에게 또는 자신에게 전부 예의를 지키는 길(?)"이라고 해본다.

어렵다. 단어도 어렵고 설명도 어렵다. 이 책은 이런 '존엄성'에 대해 빙빙 돌며 다가간다.

 

 

 책의 시작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존엄성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많은 것들이 한 인간의 삶에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것을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 존재의 광대한 지도를 그리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오만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관대히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 1901 년 리스본 페드루 바스쿠 데 알메이다 프라두 《중요한 것에 대하여》 -

 

존엄성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데에는 오만이 불가피하고 그렇기 때문에 관대함을 가지라는 것이 요구되는 것만큼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토론하고 투표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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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책을 읽고 감명 깊게 읽은 문장이다.

 

"남이 나를,

 나는 남을,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이 세 가지 물음, 세 가지 경험의 종류, 세 가지 분석의 차원은 모두 존엄성이라는 개념으로 흘러 모인다."

존엄성이라는 것을 큰 관점에서 저렇게 세 가지뿌리로부터 시작하여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질문의 시작이 존엄성이 무엇인지 말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가해자는 나를, 나는 가해자를,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여기서 존엄성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해자가 나를 무시하고 나는 가해자에게 무력하며 나는 나를 어쩔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존엄성에 대하여 생각하는 첫 발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존엄성에 대한 문제를 놓고 이러한 딜레마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존엄성과 관련된 경험, 그리고 존엄성이 속하고 그 안에서 표현되는 삶의 형태, 이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딜레마란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제왕절개를 거부하여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죽게 내버려도라는 여성과 제왕절개를 강행하려는 의사와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각자가 '나는 이러한 것이 존엄성이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존엄성과 관련된 경험'은 산모의 종교적인 경험이고 '그 안에서 표현되는 삶의 형태'는 산모와 의사와의 갈등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존엄성을 일반화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존엄한 삶의 형태의 한 면모인 생각의 자립성이 유지되려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특별히 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 ~~ 어떤 생각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론 아무 생각도 아닐 때가 무수히 많다."

생각의 자립성은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생각이 너무 휩쓸려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트렌드가 하나의 생각으로 하나의 생각이 나의 생각으로 이어지는 경우다. 이것은 생각의 자립성이 발휘된 것이 아니다.

생각의 자립성이 발휘된 경우는 그러한 트렌드 안에서의 내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거부하라는 뜻이 아니다.

분노란 정확히 무슨 뜻인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 등을 생각해보면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많이 도움이 된다.

그런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감정을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론 아무 생각도 아닐 때가 무수히 많다는 뜻은 직접 경험해보면 알 수 있다.

 

 

"존엄성이 맘에 떨어지는 것은 자립적이고자 하는 욕구를 잃어버릴 때다 자립적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질 때다. 여기에 극명하게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포기했더군""

알코올에 찌들어서 겨우 한 치 앞만 보는 인간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런 사람이 미래지향적이며 자립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립적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알코올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럴 때 그들을 보고 존엄성이 떨어진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극복하고 자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자체가 존엄성이 떨어진다는 표현이 아니고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존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존엄성이라는 단어가 중독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상상력에 힘입어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때, 사람 사이의 만남에 친밀성이 더욱 두터워진다"

맞는 말이다. 상상력은 창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타인과의 사회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기술은 역지사지이다. 역시 자시는 타인을 나로 인식하여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것을 공감 또는 이해라고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상대방을 조금 더 친밀하게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철도 한가운데서 갑자기 기차가 멈춰 섰다. ~~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답답한 게 아니라 주체적이고 스스로 판단 가능한 개인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짓밟혀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존엄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 이야기에서 기차 직원은 개인에게 명령하듯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기분이 나빠진다.

그저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철조가 한가운데에 멈춘 것은 나의 힘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나의 힘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니 감정 낭비를 하지 말자"

이러한 생각이 감정 낭비에는 도움이 되지만 여기서 나온 깊은 사고를 못한 게 한 것도 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주체적이고 스스로 판단 가능한 개인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짓밟혔다.

내가 기분 나쁜 데에는 존엄성이 훼손되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사실 존엄성이라는 단어를 생각도 사용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옳다고 생각해본다.

 

 

"동정의 표현은 자칫하면 굴욕과의 경계를 건드릴 위험이 크다. (타인의 동정은 사람을 왜소하게 만든다. 그래서 무시받는 것처럼 느낄 수가 있다.)"

정말 중요한 문장이다. 나도 이러한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잘 못 한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인 "동정하지 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동정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동정을 하면 상대방도 나도 마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닌 것 같아서 어떨 때 동정을 안 해야 되는지는 알고는 있다. 그리고 나이가 먹음에 따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를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굴욕과의 경계를 건드릴 위험'

타인의 동정이 나를 작게 만든다. 맞는 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고 싶을 때는 내가 작고 누군가는 크다.

이러한 작고 큰 관계는 어떻게 보면 갑을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조심해야 된다.

내가 갑(동정해주는) 일 때 을(동정을 원하는)에게 갑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정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정하지 마"는 다른 말로 "나는 너에게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아"는 뜻일 수도 있다.

왜 작가가 "사고를 조망하는 것과 그것을 설명으로 풀어놓아 구체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헤어짐이라는 것은 모든 관계가 곧 자기가 놓쳐버린 삶이요, 어쩌면 그리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포함하다. 그러므로 이별을 할 때는 앞서 말한 열린 미래가 특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대방에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비록 그 길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사랑에 집착하는 이는 헤어지지 못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놓아 주라는 말이 이렇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근데 상대방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중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다시 찾는 사람은 외부의 판단을 반드시 자신의 판단과 동일시해야만 할 불가피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째서 나 자신을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아야만 하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 것이 자존감이 높은 것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이 지능이 낮다는 이유로 돌을 던질 때에도 주인공의 존엄성이 낮아졌다고 하지 않은 것은 주인공은 어머니로부터 '나는 항상 소중한 존재이며 누구보다 중요하다 너는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을 맞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지능에 대하여 어떠한 자존심도 상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존엄성을 타인의 눈에 의존하지 않는 존엄성이다. 물론 영화에서의 존엄성은 이보다 더 복잡하겠지만 쉽게 예를 든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길고 깊은 인간관계가 가지는 존엄성에는 바로 이러한 솔직함이 요구되는 것이며 이것은 서로가 분담하는 정직성이 가지는 존엄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솔직함은 못생긴 긴 사람에게 "야 너는 못생겼어"라고 말하는 솔직함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온 군인이 언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온 나는 지금 명예롭게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를 명예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터에서 느낀 참담함입니다. 동료의 사지가 찢어지고 뇌가 터지며 자신의 떨어져 나가 버린 팔을 찾는 그런 전쟁터와 그들이 느끼는 참담함입니다. 저는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으로서 이 전쟁을 잘 치렀고 명예로웠고 무엇보다 이 국가에 헌신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은 잔혹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솔직한 저의 감정과 생각을 말하고 존엄성을 가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스스로 그은 경계다. 내가 견딜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만으로 존엄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존엄성의 문제는 항상 자아상과 행위의 한계선이 맞물려있다."

내가 어떤 상황이나 말에서부터 감정에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남들도 또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너의 사랑이 나의 전부는 아니야 고작 그런 것에 목숨 걸지 않아 나는 내 인생에서 너의 사랑보다 내가 나를 홍콩 사랑이 더 중요해"

반대의 경우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다니 너는 나의 전부였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야 이럴 순 없어"

이다. 어렵지 않게  자아상과 행위의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잘 알고 돌아가는 현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이런 한계선이 크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원리의 앎'이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적당히 포기할 줄 아는 힘을 길러주고 이것이 자신의 한계선을 극복해준다고 생각한다.

 

 

"가치관의 변화가 새로운 삶의 테마와 가능성 자체와는 상관없는 내적 변화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판단의 기준이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경계선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한 것뿐이라는 뜻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랑 결혼을 하였는데 여자가 부자여서 자신의 가치관이 돈에 의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외부의 영향을 통한 가치관의 변화는 대체적으로 일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새로이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가치관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변해야 하지 외부에 의해 변하면은 가치관의 변화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존엄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무리한 요구와 위협에 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답을 하기 위해선 일정 정도의 자유와 개인의 독립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남김없이 소멸될 정도로 인간이 막바지까지 올린 상황에서는 존엄성의 그 어떤 이상도 무너지고 만다. 존엄성에 대한 시비 자체가 대두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어떤 판정을 내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나는 항상 존엄성을 도대체 어디까지 따져야 하는지 기준선을 정하기 힘들었는데 여기서 딱 말해주어서 고맙다.

"개인의 독립성과 일정 정도의 자유 아래서 행해져야 하며 이런 기본적인 전제가 없다면 존엄성의 시비가 불가하다."

그래서 더욱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개인의 독립성과 일정 정도의 자유란 무엇일까?

이런 것은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서 내가 아닌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내적 변화를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할 수 있다네. 인생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뜻한다네,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정하는 것 그런 다음에 세상을 향해 얼굴을 돌려 이렇게 외치는 거라네.

"그래 , 다 내가 했어!" 아니, 더 좋은 건 이렇게 외치는 거야, "이 모든 것이 내 모습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를 후회하며 과거의 자신을 탓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생각하면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과거의 연장선이 지금의 나이다. 과거의 나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다. 삶의 전부가 나의 모습이다.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용서의 한계는 상상력과 역지사지 능력이 가지는 한계와 동일하다 ~~ 배신을 당했다면 그것을 이겨내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에게 소중한 미래를 위해 다시 한번 새롭게 상대방에게 마음을 여는 앞으로의 한 걸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말에 동감할 때 존엄성이 바로 설 수 있다."

역지사지 능력이 엄청나다면 굉장한 이해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은 나는 동화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지사지도 어느 정도에 다다르면 한계에 부딪힌다.

내가 굳이 저들을 이해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해라는 단어에 의구심이 들기까지 한다.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기보다는 인정하는 편이 더 쉬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우리랑 다르다. 왜냐하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른 것일 수도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그냥 다른 것을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마치 물을 마시면서 왜 이것이 물이냐고 맛있는 음료수가 아니냐고 따지지 않는 것처럼

 

 

"

-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것이겠군. 막대한 고통과 자신의 도덕적 존엄성을 근거로 한다면 재난이 어느 정도로 심각해야 타인 존엄성 수호의 엄격한 원칙을 무효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또한 가지는 과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요."

- "그건 바로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가 결정해요"

- "그렇다면 헌법에 명시된 엄격한 법은 뭐요? 법에는 예외가 없잖소"

- "세상이 극도로 어긋나 원뜻대로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힘들 땐 도덕성, 진실성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되겠지요"

"

민주주의가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것은 다양한 의견의 수렴과 토론 그리고 투표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책들이 이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태아의 낙태법에 관하여 위헌이라는 결론이 났다. 낙태를 시행한 여성은 처벌을 받는 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헌법재판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냈다.

"자기 낙태죄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라고 위헌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합의는 어떻게 일어나였는가? 민주주의의 체계 아래서 결정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정말로 합당한 것인지는 '신'이라는 존재나 '로고스'만 알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합의를 통해서 하나의 점으로 다다 갈 수 있다. 원에서 겉을 돌고 돌아 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은 전부 우리가 정하는 것이다. 합의를 통해 건설해 가는 과정이다. 낙태법이라는 것 말고 다른 주제도 할 수 있다.

'존엄사는 합당한가?' '동물은 언제 안락사시켜야 하는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는가?' 등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합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나치처럼 강압적이면 안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도덕성, 진실성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라는 것 또한 중요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 세계를 대면했을 때 어떤 감정, 어떤 느낌으로 반응이 오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동안 참된 경험을 방해하던 종래의 습관이나 상투적 생각, 귀에 박힌 진부한 말투 같은 것들은 모두 비우고 자신에게 일어난 반응을 우선으로 쳐야 한다."

 

누군가는 여행을 다녀와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새로운 환경에서의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바라보았냐의 차이가 아닐까

여행 중에도 자신의 습관을 고집한다면 자신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고생해야 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고생을 통해 자기 자신의 감정 변화를 통해 자기를 파악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성숙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물론 휴양지에서 책을 읽으며 생각의 변화도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파악하는 데에는 실제적인 경험이 더 크다.

 

"분노가 너무도 사람을 지배하게 되면 화를 내게 한 원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대한 일처럼 여겨지죠 ~~ 분노에 잡아먹히는 대신 분노를 넘기게 해 주려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를 상기해보면 하나의 에피소드는 큰 무게가 없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거죠. 이것이 제가 말하는 내적 거리감입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분노가 인생 전체에서 흘러가는 감정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면 분노할 것이 있나

불교에서는 감정을 자기 혼자 들쑥날쑥하는 어린아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아이를 잘 달래는 것이 성숙함의 척도이다.

내적 거리감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살짝 멀리서 보고 인생뿐만 아니라 세계에서의 나 또는 감정을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러하다 보면 나의 분노는 정말 부질없고 무게가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끝에서부터 거꾸로 볼 때 사람은 자아인식을 넓히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동안 살면서 자신에게 금지했던 것은 무엇인지, 왜 금지했는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숨겨진 기준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또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방향 전환이 아직 가능한지, 그러기 위해 어디서 용기를 얻어야 할지 등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이들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때마다 매번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삶을 끝부터 보아 라라는 말은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자세는 carpe diem 하고 다르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과거의 나를 볼 때 금지에 관한 목록들을 보면은 그 기준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또 어디서 나왔는지를 파악하다 보면은 자아인식을 넓히고 싶은 욕구에 든다. 자아인식을 넓히고 싶은 것은 자신의 대한 '앎'을 넓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삶의 폭을 더 넓혀준다. 도전정신을 깃들게 하며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파악을 잘할수록 내가 누군지 잘 알게 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성에도 손상을 입혔다. 그뿐 만이 아니다. 우리의 거짓말이 그 사람 또한 손상시켰다는 경험도 피할 수 없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깨끗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깨끗함은 그가 누려야 할 존엄성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시한부 인생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짓말은 사람의 도덕성을 낮춘다. 결국에는 둘 다 손해이다. 이런 문제는 무조건 진실되어야 한다.

 

 

"의사의 윤리는 환자의 자유 결정권 앞에서 근 한계에 다다르기 때문이죠. 환자 스스로가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법적으로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더 중요한 것은 그 동기가 환자의 존엄성 존중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는 겁니다. 의사가 환자의 의지를 무시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명백한 간섭과 월권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도덕성도 추락하는 결과를 낳겠죠"

존엄사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스위스에서는 존엄사를 두고 개방적이어서 많은 이들이 죽음을 택하러 온다고 한다. 일명 '원정 안락사'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대다수는 포기를 한다고 한다. 그만큼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철저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끝까지 되묻게 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서

정말 자신의 삶을 포기할 것인가?

이렇다고 하여도 포기할 것인가? 

하지만 확실한 것은 환자의 자유 결정권 앞에서 의사의 윤리는 한계에 다다른다 라는 사실이다. 월권은 존엄성의 훼손이다.

자신의 몸이 불구가 되고 얼굴만이 전부 인 사람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나는 부탁이라기보다는 장치를 마련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을 10번 감으면 약이 투약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기계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존엄사도 곧 우리가 치열하게 토론하고 결정이 날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정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철저해야 한다.

 

 

"고인은 그냥 육신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사고와 감정을 교차시켰던 존재로서 인간관계를 맺었던 한 인간이었다. ~~ 육신을 먹거나 판매하거나 장난을 치는 행위의 금지사항이 있는 것은 그 육신이 한때는 주체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용되거나 도구화되어서는 안 될 목적 자체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연장선상에 있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 뭔가 존엄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들고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 나와있듯이 연장선상이라는 말이 깨달음을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온다.

"훼손된 시신의 모습은 과거 한 인간이었던 존재를 살과 뼈로 이루어진 단순한 물질의 조합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또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다는 는 명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과거 자신은 자신의 시체가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의 존엄성을 위해서 훼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장기를 기증하는 것의 계약으로 인한 훼손은 과거의 그가 그런 훼손보다 장기기증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한 것이다. 그런 계약을 하였는데 장기기증을 하지 않는 것은 존엄성의 훼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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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존엄성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존엄성에 대해 정확히 안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조금 더 점에 가까워졌을 뿐이다. 존엄성이 무엇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런 존엄성을 안다고 해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돈을 얻을까? 아니다. 명예와 사랑을 얻을까? 아니다.

삶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곧 삶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존엄성을 잃어버린 삶은 삶이 아니다. 그저 살아가는 생명체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존엄성'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어렵다.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이고 이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책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다는 것은 정말 큰 자산이다. 누구도 사랑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존엄성 또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책을 통해 읽고 경험하는 것과 그냥 경험하는 것은 맛이 다를 것이다. 존엄성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솔직히 읽기에는 엄청 쉽다. 일화들이 많이 나온다. 근데 잘 읽히지가 않는다. 읽는데 오래 걸렸다.

왜냐하면 존엄성이라는 단어가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읽다 보면 알 것이다.

말은 쉬운데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읽고 나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삶을 돌아볼 것이다.

구글에 쳐보니 한 블로그가 이 책을 필독서라고 하던데 그렇게 유명한지는 읽고 나서 알았다. 그저 한밭도서관 추천도서에 떠서 읽은 것이다. 결론은 좋은 경험의 책이다. 정말 정말 추천한다.

그리고 나는 저자가 말한 목표는 달 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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